공책과연필/애프터노트
2009/11/16 21:18
몇년 전 선배의 추천으로 <신의 지문>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90년대 후반에 유행처럼 번졌던 세계종말론과 관련된 여러 책, 다큐멘터리, 정감록, 노스트라다무스, 마야 예언 등등을 포함한 책들을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일반수학의 정석 대신에 탐독하고 세계멸망이라는 예측이 선사하는 우린 더이상 공부를 안해도 되는게 아니냐는 실낱 같은 희망이자 그럼 우리모두 죽는거 아니냐는 거대한 절망을 동시에 겪으며 고뇌로 가득했던 나에게, 꽤 임팩트 있는 내용과 결말이었다. <신의 지문>을 읽고나서 한동안은 또다시 세계 멸망과 종말을 두려워하는 한편 2012년 전에는 꼭 결혼을 하고, 먹고 싶은 걸 다 먹어야 겠다며 지금 생각하면 매우 멍청한 다짐을 하곤 했더랬다.
<투모로우>의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의 신작 <2012>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의 뇌리를 스친 것이 몇년 만의 기억 <신의 지문>이었다. 역시 영화에 나오는 '지각이동설'을 비롯한 여러가지 지구멸망의 학설 및 상황들은 <신의 지문>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책 <신의 지문>이 멸망에 대한 여러가지 고대문명 및 신화, 예언로부터의 추측이라면, 영화 <2012>는 그 멸망의 순간과 결과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을만큼 뻔하지만 몇가지 단어로 나열해보자면, 미래를 예측하는 천재과학자, 미국 대통령, 돈과 권력맛을 좀 아는 기회주의 정치가, (사랑이 최고라 생각하는) 평범한 소시민 가족, 멸망을 앞둔 전세계의 모습 되겠다. 뻔하지?
그러나 지진, 쓰나미를 비롯한 거대해일은 물론 지층의 융기와 침강을 유발하는 조륙운동과 조산운동, 화산 폭발과 화산재, 화산탄, 화산력 등 화산쇄설물의 낙하 등등 일단 지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 최대의 자연재해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재난 종합선물세트랄까. 컴퓨터 그래픽을 어찌나 잘했는지 참으로 비현실적인 상황이라고 믿고싶은 장면도 보고 있으면 상당히 실감난다. 특히나 경비행기로 캘리포니아 지역을 탈출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은 마치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어트랙션을 체험하는 것 같은 긴장감과 박진감을 자아내는데 정말로 어트랙션으로 개발되어도 될 듯 한 정도다. (아쉽게도 이 영화는 소니픽쳐스 이기에 유니버설에서 어트랙션으로 개발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온갖 자연재해가 줄기차게 종류별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만큼 러닝타임은 참으로 길지만 상대적인 지루함은 덜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자체는 너무 뻔하고 또한 현실감이 없어서 보면서도 '음. 영화로군'하는 느낌. 그러나 이왕 볼거면 극장 그것도 큰 스크린에서 봐야하는 스토리는 놀랍지 않으나 시각효과는 놀라운 재난실감무비. ★★☆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 사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