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과연필/시크릿노트
2009/01/14 17:06
장난감, 그리고 장난
원래 예쁜 여자일수록 콧대가 높고,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남자일수록 한눈팔기가 쉽다고 했다. 재미있고 톡톡 튀는 놈일수록 멋대로 다루기가 힘들며 오히려 질질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인간관계도 이러한들 사물과의 관계도 다를 바 없다. 애지중지 카메라를 다뤄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카메라는 친구도 사물도 아닌 ‘신주단지’요 ‘어르신’이다. 남들이 장난감이라 하는 토이카메라도 역시 카메라인바, 절대 만만한 장난감이 아니어서 그 교만함과 의기양양함, 다루기 힘든 정도를 말한다면 콧대는 피노키오요, 말괄량이로 치면 삐삐를 넘어선 삐삐 할머니 급이다. 한마디로 고이고이 다뤄주지 않으면 금새 토라져 사진 구경조차 힘들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사 년째 모시고 있는 토이카메라로 말씀드리자면 눈동자가 네 개 달린 수퍼샘플러님이시다. 영화 토이스토리에 나오는 캐릭터마냥 노오랗고 매끌매끌한 개성이 철철 넘치는 플라스틱 바디를 자랑하며 한 장에 네 컷의 사진을 그것도 시간의 순서대로 움직임을 포착하는 재미있고 대단한 능력을 지닌 특별한 녀석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제대로 모셔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물건 중에 물건‘이다. 이 골치 아픈 녀석의 흉을 보기 시작했으니 더 끄집어내보겠다. 이 녀석을 데리고 삼사년 사진을 찍으면서 어지간히 쌓인 게 많으니 말이다.
일단 이 녀석은 아무데서나 제 실력을 발휘해주지 않는다. 해바라기도 아닌데 광합성을 하는 것도 아닌 주제에, 태양을 너무 밝혀서 이 녀석의 예민하기 그지없는 네 개의 렌즈는 태양이 아니면 영 반응을 하지 않는다. 어르고 달래다가 윽박을 지른다 해도 수퍼샘플러가 태양 이외의 빛에 무릎을 끓는 날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우리 수퍼샘플러님은 흐린 날이나 어둑한 실내에서는 금새 우울해지고 토라져 뱉어내는 사진들 또한 피사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예 안 나오는 사진들도 있다. 열심히 찍어봐야 내 맘대로 안 나온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늘 햇볕이 쨍쨍하다 못해 타죽을 것 같은 날에만 수퍼샘플러를 대동한다.
그것뿐인가. 다른 카메라에는 다 있는 뷰파인더는 아예 소유하고 있지도 않다. 앞뒤, 좌우를 훑으며 종일 뷰파인더를 찾아봤자 이 콧대 높은 수퍼샘플러님께서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대신 임시로 붙여놓은 것 같은 작은 플라스틱 테두리가 정수리에 꽂혀있어 이 허접한 사각프레임을 통해 피사체를 살펴야 한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잡는 자세가 엉성해져버려 렌즈를 손가락으로 가린 멍청하고 어이없는 사진들을 수없이 양산해야 한다. 가끔씩은 이 녀석이 아니라 내가 장난감이 된 듯한 기분을 맛봐야한다는 것이지.
이 통렬한 실망감과 난감함을 견디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모든 굳은 의지와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다. 나의 사진찍기를 촬영이 아닌 재미로, 혹은 그야말로 ‘장난’으로 생각해야 수퍼샘플러가 말을 듣기 시작한다. 나의 페이스가 아닌 수퍼샘플러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서 무릎꿇고 흰 깃발을 흔들며 항복하면 그제서야 수퍼샘플러는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인다. “심각하게 찍지마. 너는 예술사진을 찍는 게 아니야. 그냥 놀아보자구. 어떻게 나오던 상관없어. 일단 날씨가 좋으면 튀어나가, 그리고 마음껏 찍으란 말이야! 어때? 즐겁지 않겠어?” 이 교활하고 달콤한 속삭임에 홀딱 넘어가 카메라로 장난을 치기 시작하면 이 뻔뻔한 녀석은 예상도 못했던 즐거운 사진들을 뱉어주고 나의 놀라움을 향해 살짜쿵 윙크해준다. 이런, 그때의 그 쾌감이란!
그래서 나는 4년째 이 귀여운 ‘토이’카메라와 손을 잡고 장난을 치고 있다. 정지된 풍경, 모든 것이 멈춰있는 순간에 집착하던 나는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과 움직이는 세상, 늘 보고 늘 찍던 눈높이가 아닌 엉덩이 높이, 이마높이에서 본 의외의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멋진 세상이 아닌 재미있는 세상을 추구하게 되자 나의 사진 역시 초점과 앵글 따위는 완전히 무시했지만 재미와 에너지가 살아 숨쉬는 즐거운 결과물로 바뀌었다.
사람과의 만남도 세상과의 만남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기준, 내가 하고자 하는 목적에 그대로 맞추고자 하면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내 장단에 맞춰주지 않는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들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면, 혹은 좀 더 재밌어지려고 하고 좀 더 즐거워지려고 한다면 도리어 세상의 모든 공기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손을 잡고 천천히 춤을 추며 내 주위를 돈다. 그리고 어려웠던 일들이 슬슬 풀리는 것이다. 마치 수퍼샘플러가 나에게 그렇게 해주었듯이 말이다. 그렇게 나는 수퍼샘플러와 장난을 치고, 이 녀석이 가르쳐 준대로 세상과 장난을 친다. 나를 둘러싼 일상들이 내 뜻대로 안 되는 날엔 수퍼샘플러의 나지막하고 달콤한 속삭임을 떠올린다. “온몸에 힘을 빼. 그냥 놀아보자니까...” 토이카메라 수퍼샘플러는 결국 세상을 나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월간 포토넷 2005년 11월호 中

